미국 이민자들이 처한 현실

jpiclogo_banner
maria francine sent May 2013_s저는 현재(2013년 4월) 미국 이민법으로 인해 가족이 떨어져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최선의 방법은 관련된 사람들의 종류에 대한 갖가지 예화들과 몇 가지 공통적인 어려움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콘라도

콘라도는 우리 교리교사 중 한명의 남편이며 성체 분배 봉사자입니다. 그는 두 군데의 식당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데, 어느날 밤 늦게 귀가하던 중 경찰이 가벼운 교통 위반으로 그를 붙잡았습니다. 콘라도는 사회보장번호가 없었기 때문에 면허증을 딸 수도 없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실을 알고 무면허 운전으로 그를 구금시켰습니다. 법적 처리에 들어가자 이민법이 적용되어 보석금을 내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콘라도가 이송되기 전에 한번 그를 찾아간 적이 있는데 이 가여운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는, 아니면 적어도 금방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그저 울고만 있었습니다. 교통 위반 재판은 철회되었고 가족들이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콘라도는 북 켄터키에 있는 분 카운티(Boone County) 교도소로 훌쩍 이송되었습니다. 그 무렵 분 카운티 교도소는 불법 이민자들을 수감하는 곳이었습니다. 십중 팔구 콘라드를 멕시코로 돌려 보낼것 같아 저는 은퇴한 형사 전문 변호사인 친구를 보냈고, 친구는 콘라도가 변호사인 자기에게 일임하여 아이들에 대한 모든 권리를 아내에게 맡기도록 했습니다. 멕시코로 추방될 경우 아이들이 미국을 떠날 수 있는 여권을 만들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변호사 친구는 그를 만난 후에 내게 전화를 걸어, 자신은 평생 많은 범법자들을 만나 보았지만 콘라도같은 사람은 수감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젊잖고 예의바르고 늘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집에서 그의 아내는 어쩔 줄 몰라했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콘라도나 그의 아내나 아이들에게 자기네 아버지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멕시코에 가 있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뵈러 갔다고 말입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헬린 수녀님의 그 해 첫 영성체 교리반에는 콘라드의 아들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아이가 눈에 띠게 변하는 모습이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 전에는 늘 웃는 얼굴에 행복한 아이였는데 아버지가 곁에 없으니까 바로 위축되면서 거의 자기만의 세계안으로 숨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아이는 그 때 첫 영성체를 하지 못하고 이듬해 프로그램을 계속 했습니다.

콘라도는 추방을 막기 위해 한 가지 행동을 취했습니다. “추방 철회”라 불리는 절차를 밟은 것입니다. 10년 이상 거주했고,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어야 하고, 세금을 냈으며 중죄 범법 사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콘라도는 이 조건들을 모두 갖추었기에 8,000불을 들여 이민법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민부에서 보석금을 받아들일 경우 최소 1,500불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 “극도의 시련”임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이민법 소송에 가 있었는데 검사는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들들에게는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드문 경우도 아니고 극도의 시련도 아니다!, 라고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5년이 지난 후에도 콘라도의 사례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민부가 신시내티에서 법원을 폐쇄하고 모든 사건들을 클리블랜드로 보냈기 때문에 그가 고용한 신시내티 변호사는 더 이상 사건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아 클리블랜드 변호사에게 의뢰했습니다. 새 변호사는 수 천달러를 더 청구하면서 가족들이 전액을 지불할 때까지 사건을 연기했는데 법원에서는 재판 일정을 10월로 잡고 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Mary Heleen

빠코

또 다른 사례는 빠코라는 본당 신자와 관련된 것입니다. 빠코는 교회를 돕기 위해 음식 판매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번호판에 조명을 켜지 않아 걸렸고, 역시 교리교사 중 하나인 그의 아내는 울면서 우리 사무실에 찾아와서는 빠코가 잡혔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녀는 카리스마가 대단한 사람이었고 성경을 늘 지니고 다니는 사람으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도록 맺어 주신것을 사람이 갈라 놓을 수 없으니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헤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거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빠코의 고통이 지니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둘 다 욥기를 들여다 보았지만 고통은 신비이기에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빠코가 체포되고 난 5일 후는 성지 주일이었고 그는 십자가의 길 재현에서 병사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자기 자신의 십자가의 길이 더 큰 현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마리는 그 해 마리아의 역을 맡았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팔에 안으며 그를 향해 독백을 던지는 부분에서 마리는 “사람들이 너한테 왜 이런 짓을 한걸까? 너는 아무에게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해, 십자가의 길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 그의 가족은 겨우 변호사의 수임료를 지불했고 사건에서 승소했습니다. 두 아들은 자문가에게 찾아가야 했는데 그가 판사에게 추천하여 그의 가족이 멕시코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했습니다. 이 가족들은 추방 철회 절차를 밟을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는 축복받은 편에 속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합니다.

마리아 뽀르피로

저는 마리아 뽀르피로를 기억합니다. 남편과 마리아는 둘 다 원주민이고 어린 두 아이들과 아기가 있습니다. 남편은 10년 이상 거주하지 않아서 추방 당했고 추방 철회 신청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내는 무직 상태에 아이가 셋 입니다. 라틴계 집 주인은 한 달 가량을 더 머물 수 있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저는 멕시코 영사를 만났는데 그분은 가족이 재결합할 수 있도록 마리아의 항공 비용을 부담 해주었습니다. 저는 아침 6시에 신시내티에서 비행기를 타야 하는 마리아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게이트까지 함께 갔습니다. 마리아는 비행기에 오르며 돌아보았고 저는 한번도 비행기를 타 보지 못하고, 이런 아픔을 겪고 있으며, 거의 영어도 못하면서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가야하는 마리아를 돌보아 주시라고 주님께 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마리아 뽀르피로의 가정과는 달리 몇 몇 가정은 가족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편을 택합니다. 예를 들어 그 첫 번째 부부인 마르타와 죠지는 제가 이곳에 오자마자 결혼했습니다. 죠지가 법적 서류를 준비하러 본국으로 이송된 후 10년 정책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푸에르토 리칸인 마르타는 남편의 원주민 마을에서 살아보려 노력했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르타와 아기는 푸에르토 리코로 돌아가고 결국 가족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일반적 어려움

제게 찾아 온 여자분 한 명은 방금 새 아파트로 이사해 들어갔기에, 남편이 잡혀 들어갔을 때 는 보증금을 지불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새 집주인을 찾아갔는데 자신의 철저한 원칙이 보증금을 절대로 돌려주지 않는 거라고 했지만 그녀의 딱한 사정을 이해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결국 보증금을 돌려 주었습니다. 오래 전에 어떤 남편들은 자기들의 가족과 함께 하려고 돌아오곤 했는데 추방 후에 돌아오면 다시 잡힐 경우 감옥살이를 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검문 없이 국경을 넘는 일이 위험할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보다는 그럴 경우가 훨씬 적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집의 가장은 지난 해 국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었으며 또 다른 젊은이 한 명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여러 사례에서 언급했듯이 2007년과 2008년에 흔히 시행되던 일이었고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것은 교통 법규를 위반한 불법 이민자를 체포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이든 교통 법규를 어긴 사람은 흔히 면허증이 없어 구금되었다가 이민법의 제재를 받습니다. 이곳 오하이오 데이튼의 경찰 청장은 2009년, 이러한 시행이 이민자들뿐만 아니라 데이튼의 다른 거주민들에게도 무분별한 일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데이튼 경찰은 법정에서 사건을 해결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교통 법규 위반자들로 교도소를 채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찰 청장은 일반적인 경우 무면허 운전을 발견하는 첫 번째 경우에는 교도소에 수감할 수 없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위반 시에는 경찰관의 식별에 달려 있습니다. 새로운 시행으로 인해, 우리가 비교적 경미한 위반에 비해 터무니 없는 처벌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 줄어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불법 이민자들은 가능하면 적법한 면허증을 따겠지만 오하이오 주에서는 면허증을 획득하려면 사회보장번호가 필요합니다.

가족들이 헤어져야 했던 경우들 중 제가 보았던 가장 마음 아픈 사례는 어머니와 성인이 된 딸의 경우였습니다. 딸은 말하고, 요리하고, 필시 자녀를 양육하는 법 등 모든 것을 어머니로부터 배웠습니다. 가족이 함께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딸의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인데, 일단 이곳에 온 이상 본국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딸은 이제 어머니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여의거나 8년 혹은 그 이상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여성들도 많습니다. 그들이 느끼는 슬픔은 너무 커서 거의 아무 것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멕시코의 관습은 가족을 매장한 후 가족들과 함께 9일간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인데 이런 여성들은 애도 절차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 가족 모임을 갖지 않습니다.

사실 대가족은 아주 중요한데 가끔은 아이들이 조부모와 너무 오래 떨어져있다 보니 아이들은 영어를 배우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스페인어 밖에 못하게 되면서 함께 모국어로 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한 에콰도르 부부는 딸을 에콰도르의 조부모에게 남겨두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소녀는 십대 때 개인적 문제가 있어 부모와 함께 살기 위해 마침내 미국으로 왔지만, 부모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자신이 다섯 살이 되던 해로 남아 있는데 15세가 되어서야 부모와 얼굴을 대면하게 되었으니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일반적으로 우리 청소년들은 어느 날 자기들의 부모가 집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두려움에 직면하며 살아갑니다. 도전은 이것 말고도 또 있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동기 결여에 직면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미국을 고향으로 생각합니다. 한 소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갈 수 없어서 너무나 낙담했습니다. 운전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소녀는 간호학을 공부하기 위해 멕시코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해 온 아이입니다. 저는 현재의 멕시코는 이제 그 애가 돌아가서 보게 되리라고 상상하고 있는 멕시코가 아니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스페인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미국에 있는 부모님이 보고 싶어도 돌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추방유예 시행령이 반포되었을 때 아이는 막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지금은 근로 허가를 취득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으며 2년제 지역 대학에 진학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청소녀들은 특히 동기 결여와 두려움으로 고통받는데 가족 중 한명이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초조함이 배가 됩니다. 아틀란타 주교님이 지적하였듯이, 가족의 분리는 그들이 매일 체험하는 두려움 입니다. 게다가 다른 문화를 수용해야 하는 일이 감정적으로 또 다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네 다섯 명의 이민자 중 한 명 꼴로 문화적 충격과 가족의 지지 부족으로 우울증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은 더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모국에서는 직업을 갖지 않고 가정을 돌보는 일만 했지만 이곳에서는 둘 다 해야합니다.

이 곳 미국에서 우리는 (사면이 아니라) 합법화를 언급하기 시작했는데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과 고향을 오가며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젊은이들은 또래 아이들에게서 자기들의 정체성을 게 마련인데 한결 더 학교의 동기들처럼 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가족들이 해체되지 않으리라는 꿈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줄 수 있는 여러분처럼 선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리아 프란신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