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프란첼리아 Mary Francelia 수녀 ND 3441 PDF Download
마가렛 앤 클링션 Margaret Ann KLINGSHIRN
미국,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관구
출 생: 1917년 11월 11일 오하이오 에이븐
서 원: 1938년 8월 16일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사 망: 2022년 8월 11일 캘리포니아, 뉴베리 파크, 병자들의 건강이신 모후
메리 프란첼리아 수녀는 프랭크와 크리스티나 클링션의 둘째 자녀였고 마가렛 앤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925년, 갑작스런 모친의 사망으로 마가렛과 형제들은 외할머니가 양육하게 되었다. 마가렛의 할머니는 어떠한 젊은 여성도 “살림, 재봉, 요리, 약간의 정원일을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집을 떠나면 안된다”고 믿었던 “꽤나 엄격하고도 영적인 여인”이었다. 1931년에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가족들은 오하이오 셰필드로 이사했으며 한 명의 의붓 자매와 세 명의 의붓 형제, 그리고 마침내 세 명의 의복 형제들이 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
마가렛은 우선 에이븐에 있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나중에는 셰필드의 성 테레사 학교에서 노틀담 수녀들을 알게 되었다. 지역의 공립 고등학교 3년을 마친 다음 1935년 9월 8일에 청원자로서 안젤가에 있는 노틀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마가렛은 이듬해 메리 프란첼리아 수녀로서 착복했다.
수녀는 8세 때부터 “수녀 교사”가 되고 싶었다. 1938년부터 1962년까지 클리블랜드, 오하이오 일리리아의 가톨릭 초등 학교와 워싱턴 DC 가톨릭 대학교의 캠퍼스 학교에서 처음에는 교사로서, 이후에는 교장으로서 사도직을 했다. 1962년에는 캘리포니아로 파견되어 헌팅턴 파크의 성 마티아스 학교에서 2년간(1962-1964) 교장이자 8학년 교사로서 일했다. 이후에는 벤투라의 성모 승천 학교에서 교장이자 장상으로서 6년을, 이후 다우니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학교에서 1년간 8학년을 가르치며 보냈다.
캘리포니아로 오기 전에는 교직 외에도 오하이오와 캠퍼스 학교에서 실습 교사들 감독을 담당했었다. 1972년 9월, 수녀는 캘리포니아 노틀담 학교들의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3년 후인 1974년 12월에는 메리 윌리엄 가라 수녀의 후임으로 신비로운 장미 관구의 관구장이 되었다.
관구장으로서 메리 프란첼리아 수녀의 임기는 수녀 자신이 “결코 느끼지 못했던 방식으로 (스스로를) 넓혀주었고 풍요롭게 해 주었다”고 기록했듯이, 독일과 로마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와 브라질 방문의 기회를 통해 세계의 노틀담을 알게 해 주었다. 어쩌면 임기 중 가장 주목할만한 업적은 타우젠드 옥스에 노틀담 본원을 건축한 일이었을것이다.
관구장 임기를 마친 다음에는 첫 사랑, 즉 교직으로 돌아갔다. 1981년, 수녀는 벤투라에 성심 본당 학교를 열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유치원과 1, 2학년부터 시작해서 체계적으로 매년 새 교사와 새 학년을 추가해 가며 그러한 사업이 요구하는 필요한 건축을 감독했다.
1998년에는 웨스트레이크에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A.F.언어 국제 학교 직무를 받아들였다. ESL교사로서의 소임으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접하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자격을 갖추거나 미국에서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여러 양식의 직업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메리 프란첼리아 수녀는 2002년에 노틀담 본원으로 이주해 온 이후에도 A.F. 언어 학교와 방문 체류하던 한국 수녀들의 영어를 도움으로써 적극적으로 교육에 관여했다. 동시에 공동체 성체 조배 시간에 함께 했으며 수녀원 곳곳에 멋진 꽃꽂이를 도맡았다.
수녀를 알고 지내던 모든 이에게 달인 교사로서 메리 프란첼리아 수녀의 뛰어난 모범에 대해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