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자야 Mary Jaya 수녀 ND 6032 PDF Download
알레이쿠티 매튜 파티마키엘 Aleykutty Mathew Pattimakiel
인도, 카르나타카 방갈로르, 성모 방문 관구
출 생: 1945년 1월 27일 케랄라 푸날루어
서 원: 1966년 1월 6일 비하르 자말푸르
사 망: 2018년 4월 20일 카르나타카 방갈로르, 노틀담 관구 본원
장 례: 2018년 4월 22일 방갈로르 노틀담 관구 본원
매 장: 2018년 4월 22일 방갈로르 성 패트릭 묘지
알레이쿠티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부모였던 매튜와 마리암 파티마키엘의 첫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리고 8일 후 엘리자벳으로 세례를 받았다. 1953년에는 첫 영성체를 하고 견진성사를 받았다. 두 명의 남동생과 여동생, 이렇게 세 명의 동생들이 그 뒤를 이었다. 8학년이 되자 고등학교 학생들만을 위한 피정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 피정 중에 북 인도 선교사들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그들처럼 선교 사업에 이끌렸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이런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첫 영성체 후에는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과 이(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갈망)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수도 생활을 선택한 데에는 외삼촌과 노틀담 수녀인 사촌 라니타 수녀에게서도 영감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엘리자벳은 적극적인 회원이었던 학교 교우회 활동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견진성사때 주교였던 삼촌 세바스찬 신부에게서 얻은 지혜로운 조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성령의 영감에 열려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개방성은 자야 수녀의 온순한 성품을 기억하듯이 그 삶에서 계속적으로 부드러운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1960년, 엘리자벳은 비하르 자말푸르의 철도 마을에 있는 노틀담 수녀회에 입회했다. 1964년에 수련소에서 수도 양성을 시작하면서 메리 자야 수녀라는 이름을 받고 승리의 왕 그리스도를 주보로 삼았다. 수녀는 1966년에 성 요셉 성당에서 유기선서를 했으며, 1970년에 비하르 파트나 관구 본원 성당에서 종신 선서를 발했다.
메리 자야 수녀는 파트나 여자 대학과 마이소르 대학교에서 각각 교육과 고등부 학업을 마쳤다. 수녀는 42년간 열정적이고 영감을 주는 지리학 교사였다. 다양한 재주를 지닌 사람으로서 교직 이외에도 여러 가지 중대한 책임을 맡았다. 메리 자야 수녀는 파트나 노틀담 아카데미 교장이었고 자말푸르, 방갈로르, 미아소르, 바사이 공동체의 분원 책임자였다. 10년간 남인도의 지역 책임자였고 관구 참사였으며 신체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해지기 전까지 관구 비서로 봉사했다.
메리 자야 수녀의 성품의 관대함과 말없는 경청은 많은 젊은 노틀담 회원들에게 연민의 찬 멘토요 귀중한 지혜의 여인이 되게 했다. 수녀는 언제나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인내심이 있었으며 인간적이면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애정 표현이 빈번하지는 않았지만 수녀를 찾아갔던 모든 이들은, 학생이든 동료든 학부모든 누구든 이해 받았다는 기쁨을 안고 돌아오곤 했다.
마음과 행동으로 참 선교사였던 메리 자야 수녀는 지칠 줄 모르고 일했으며 그리스도와 같은 연민과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을 서둘러 도왔다. 수녀는 자신이 이루어 낸 많은 일들과,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영향을 끼쳤던 수 많은 이들을 통해 주님을 섬겼다. 사랑하는 자야 수녀는 생전이나 내세에서나 우리에게 계속 영감을 주고 미래 세대에게 기쁨에 찬 고통의 등불로 남아 있으리라.
메리 자야 수녀는 2008년 암 판정을 받았지만 빠르게 회복하여 쇄신된 열의를 가지고 사도직으로 되돌아 갔다. 약 2년전 파킨슨 병과 다른 암이 수녀의 활동적인 삶을 더디게 만들었다. 마지막 한 달만 제외하고는, 하느님에 대한 바위 같은 신앙과 강인한 결단력으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지난 한 달간은 수녀의 병이 완전히 신체를 장악했고 주님께서는 2018년 4월 20일, 오후 4시 30분에 친히 수녀를 데려가셨다.
친애하는 자야 수녀님, 수녀님의 온유한 현존과 깊은 신앙이 계속해서 수녀님의 자매 수녀들과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영감이 되어주기를 빕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