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케이 수녀 (Sister Mary Kay) ND 5913 PDF Down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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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프란시스 와잇(Kay Frances WHITE)
미국, 오하이오 샤든 그리스도 왕 관구
출 생: 1943년 7월 10일 오하이오 일리리아
서 원: 1963년 8월 16일 오하이오 샤든
사 망: 2016년 8월 23일 플로리다 팜비치
장 례: 2016년 8월 30일 오하이오 샤든 관구 본원
매 장: 2016년 8월 30일 샤든 부활 묘지
케이는 자서전에 출생 시 부모 챨스와 메리(맥도넬) 와잇의 환영을 받은 “약간의 천국”으로 스스로를 묘사하고 있다. 평생을 케이와 두 자매 사이의 강하고 지속적인 가족의 유대는 케이가 매일의 기도 중에 그들의 기쁨과 근심을 품을 때 힘과 삶의 원천이 되었다. 케이는 일리리야의 성 메리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첫 영성체을 하면서 “와서 나를 따라라.”라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 때 내 영혼에 특별한 작은 촛불 하나가 켜졌다.”라고 케이는 기록하고 있다. 수도자가 되려는 목표를 향한 첫 째 단계는 클리블랜드 노틀담 아카데미에 지원자로서 입학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1961년 2월 2일에 노틀담 수녀회에 입회했고 착복 때 메리 버치만즈 수녀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세례명인 케이로 되돌아 간다.
메리 케이 수녀는 클리블랜드의 성 요한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오하이오 보울링 그린 주립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두 학위 모두 교육 분야였다. 수녀는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오하이오, 버지니아, 플로리다에서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사도직에서 뛰어난 가톨릭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수녀는 교직을 즐겼으며 수없이 많은 아이들의 성사를 준비시켰다. 수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했고 전념했으며 – 수녀의 교실에서는 어떠한 방해요소도 허용되지 않았다 – 아이들은 그 때문에 수녀를 아주 좋아했다!
어린 소녀였을 때 어머니를 따라 지역 간호와 호스피스의 집을 방문하면서 새로운 사도직으로의 이동에 대한 씨앗이 뿌려졌다. 2001년, 메리 케이 수녀는 노인, 병자, 임종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시작했다. 방문을 하면서 이해와 연민으로 근심거리에 귀를 기울였다. 케이 수녀는 특권처럼 자신이 내어 주는 것도 좋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남들로부터 받았던 것을 몹시 좋아했다. 수녀는 삶의 마지막 시기을 겪는 이들과 함께 여정을 걷는 동안 형성된 연계의 유대를 소중히 여겼다. 수녀는 동반과 현존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동반하고 그 자리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영예처럼 느껴졌다.
수녀가 임했던 또 다른 사도직은 “전화 사도직”이었다. 플로리다에 살면서 오하이오의 집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이는 공동체 수녀들과 자신이 사랑하던 이들에게 다가가고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수녀는 걷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마일 씩 걸었고 많은 친구들이 있었으며 많은 관심과 친절의 행위를 베풀었다.
2년 전, 메리 케이 수녀는 암을 선고받았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언제나 기도의 힘으로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지난달 수녀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수녀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지만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평화로웠다. 수녀가 매일 접하는 모든 이들은 수녀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었고 수녀가 자신의 목표에 충실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수녀는 이렇게 기록했다. “일단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내 영혼에 지펴진 불꽃은 나의 신랑이신 분에 대한 사랑으로 타오르는 불길이 되었다.” 수녀는 하느님 현존의 평화와 빛 속으로 아주 조용히 들어갔다. 메리 케이 수녀가 영원한 삶 안에서 기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