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아드리엔 수녀

Adrienne

메리 아드리엔 (SISTER MARY ADRIENNE)                        ND 4331

앤 메리 릴(Ann Mary RIEHLE)

(메리 로즈 엠마 수녀와 메리 헬렌 죠셉 수녀의 언니)

미국 켄터키 커빙턴, 원죄 없으신 성모 성심 관구

출 생 1926년 8월 2일 밀포드, 오하이오
서 원 1946년 8월 13일 커빙턴, 켄터키
사 망 2013년 4월 16일 커빙턴, 켄터키
장 례 2013년 4월 19일 커빙턴, 켄터키
매 장 2013년 4월 19일 수녀원 묘지, 커빙턴, 켄터키

앤 메리 릴은 1926년 8월 2일 오하이오 밀포드에서 다섯 아이의 맏이로 태어났다. 후에 여동생 둘은 메리 로즈 엠마 수녀, 메리 헬렌 죠셉 수녀라는 이름을 가진 노틀담 수녀들이 되었다. 앤은 1936년 식구들이 오하이오 러브랜드에 있는 삼촌 댁 농장으로 이사할 때까지 밀포드에 있는 공립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나중에 자신의 농장을 구입하였다. 그는 또 러브랜드에 있는 성 골롬바 수녀회 수녀원을 지은 장인 목수이기도 했다. 앤은 맏이였기 때문에 노틀담 아카데미 1학년 생으로서 지원자가 될 때까지, 가정 주부였던 어머니를 돕는가 하면 농장 일도 거들었다. 1946년에 첫 서원을 했지만 그 전년도에 이미 자신의 교육 사도직을 시작했다. 1957년 수녀는 초등교육 학위를 수여했다.
메리 아드리엔 수녀는 1965년 일리노이 리버포레스트에 있는 로사리 대학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기 전까지 20년을 초등학교 교사로 보냈다. 학교 도서관 사서로서 초등학교, 교육학교에서 사도직을 하였으며 토마스 모어 대학에서는 도서관장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수녀는 두 명의 여성들이 노틀담 수녀회에 입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다음에 메리 아드리엔 수녀는 가르치는 소임으로 돌아가 14년을 더 교사로서 머물렀다.
수녀는 교직,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가정 사도직에 임했던 시기는 수녀에게 특별히 소중한 것이었다. 그 때 가장 좋아하던 장소는 흑인 학생들과 지내던 알라바마 주의 버밍햄과,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던 켄터키의 하란이었다. 수녀는 혜택을 덜 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 줄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었다. 메리 아드리엔 수녀의 성체에 대한 사랑은, 하란에 살 때 그 부근에 미사가 없어 수녀와 몇몇 수녀들이 함께 미사 성제에 참례하기 위해 먼길을 마다않고 갔던 시절에 잘 드러나곤 했다. 수녀의 또 다른 기쁨은 여름에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사서로써의 역할 중에서 아드리엔 수녀는 교구 가톨릭 어린이의 집에서 아이들과 일하는 것을 특별히 즐겼다. 수녀는 그 어린 아이들을 사랑했고 14년 동안 그들의 방치된 가정에서 누리지 못하는 보살핌을 주려고 노력했다.
2005년 수녀는 관구 본원으로 들어와 여러가지 일들을 도왔다. 건강이 악화되고 쇠약해 지면서 수녀는 루르드 홀 케어 센터의 일원이 되었다.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동생들과 친구들의 방문을 즐겼다. 도움이 주어지면 항상 감사했고 제공되는 모든 활동에 참석하였다. 거기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누군가가 프로그램을 진행해 주려고 애를 썼다면 자신은 거기에 참여하는 것으로 감사에 보답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을 뜨기 한 달쯤 전부터는 유동액만 섭취할 수 있었지만 단 것에 대한 취향을 잃는 법이 없었다. 4월 16일 오후 메리 로즈 엠마 수녀가 방으로 찾아갔을 때 메리 아드리엔 수녀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 본향으로 떠난 후였다. 하느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영원히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를. 평화의 안식을 얻으소서.